식용유 100년 타임캡슐 – 참기름에서 아보카도유까지, 우리 식탁이 변해온 비하인드 스토리


1. 조선의 향기 – 참기름·들기름 일색이던 시절

까치발 들어 참깨를 털어 모은 뒤 돌확에 한겨울 밤새 눌러서 짜낸 참기름은 조선 시대 부엌의 귀한 보물이었다. 향이 쉽게 날아가 냉장고도 없던 시절, 새해 첫 나물에 ‘갓 짜낸 기름 한 방울’을 넣는 것이 큰 행사였다. 들깨로 낸 들기름은 묵국과 수제비에 고소함을 더해 주는 풍미유로 사랑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름을 ‘사서’ 쓰는 개념은 희박했고, 가내 채유가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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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중 문헌에는 ‘참기름을 하사한다’는 기록이 종종 등장한다. 귀한 손님에게 기름을 선물하는 것은 당시 최고급 예우였다.
  • 지방 군현에서는 가을 들깨와 참깨 세(稅)로 모은 기름을 역꾼들의 식사 조리용으로 배분하기도 했다.

2. 1960~70년대 – ‘콩기름’이 곧 ‘식용유’가 되다

6·25 전쟁 직후 미국 농산물 원조(PL‑480)로 대량 유입된 탈지대두는 한국 식품 산업 지도를 바꿨다. 1971년 동방유량이 ‘해표 식용유’(정제 대두유)를 출시하며 ‘식용유’라는 단어가 콩기름과 동의어가 됐다. 집집마다 새하얀 주전자 모양 통을 비치하고, 전을 부치든 튀김을 하든 ‘식용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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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광고 카피는 “기름 연기 안 나요!”였다. 정제 공정 덕분에 잡냄새가 적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해표는 부산항에 남아 있던 미군 잉여 대두유를 정제해 시제품을 만들었다. ‘전쟁 잔재’를 생활 필수품으로 바꾼 셈이다.

3. 1980년대 – 해표 vs 백설, 밥상 위 브랜드 전쟁

1979년 CJ제일제당(당시 제일제당)이 ‘백설 식용유’를 내놓으며 가격·유통 경쟁이 치열해졌다. 빙그레 같은 유업체도 참전했지만 두 거인이 시장을 양분했다. 소비자는 가격 할인행사 때 회사별 ‘사은품’을 비교하며 장을 봤다. 이 시기 식용유 1.8 L 페트병이 보급되면서 보관·용량 기준이 표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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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설과 해표는 ‘식용유’라는 일반명칭을 두고 상호 출고지·제조지 표기에 관해 공정거래위원회 심의를 받은 적이 있다. 브랜드 전쟁이 곧 법정 공방으로 번진 첫 사례였다.
  • 88 서울올림픽 이후 가정 TV 광고 속 튀김요리 장면이 급증했다. “노릇노릇”이라는 표현이 유행어가 된 것도 이때다.

4. 1991년 수입 자유화 – 올리브유와 함께 온 ‘웰빙’ 첫 물결

1991년 가공유지류 수입이 전면 자유화되자 스페인·이탈리아산 올리브유가 백화점 식품관에 등장했다. ‘익스트라 버진’이라는 생소한 라벨이 세련된 주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같은 시기 해바라기유·옥수수유 등 수입 농산물 기름도 대형마트에 진열되며, 처음으로 “원산지·원료명을 보고 기름을 고르는” 문화가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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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올리브유는 500 mL 한 병에 만 원이 훌쩍 넘었다. ‘쇠고기 한 근’ 값이던 터라, 선물세트 시장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 TV 요리연구가 이종임·이혜정이 올리브유를 사용한 파스타·샐러드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대중적 인식이 급속히 확산됐다.

5. 2000년대 – 프리미엄 기름 삼국지

2000년대 중반 ‘지중해식 식단’이 웰빙 키워드로 뜨면서 올리브유 소비가 급증했다. 하지만 높은 가격과 낮은 발연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자, 업계는 포도씨유(발연점 ≈ 230 ℃)와 해바라기유를 ‘튀김·구이용 프리미엄’으로 마케팅했다. 2010년 전후 포도씨유 시장은 1,000억 원 규모까지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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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셰프 이연복이 “중국집도 이젠 포도씨유 써요”라고 말한 장면이 화제였다. 이후 백화점 시식 코너에서 춘권 튀김 시연이 유행처럼 번졌다.
  • 일부 수입 포도씨유 브랜드가 ‘콜레스테롤 제로’라는 문구를 과장 표기해 식약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행정 처분을 받았다.

6. 2010년대 – 카놀라유의 황금기

카놀라유(유채씨유)는 상대적으로 낮은 포화지방과 높은 발연점, 합리적 가격 덕분에 ‘만능유’로 자리 잡았다. CJ·사조·신세계푸드 모두 국내 압착 설비를 증설하며 카놀라유를 주력으로 삼았다. 편의점 도시락·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에서도 튀김유를 카놀라유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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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카놀라유 수출이 처음으로 1만 톤을 돌파하며, 한국산 가공식품이 동남아 시장에서 인기를 얻는 데 일조했다.
  • 세계 유가 상승기에 글리세린 원료 확보 차원에서 카놀라유 부산물(유지분해유)을 바이오디젤로 사용하는 연구도 국책과제로 진행됐다.

7. 2020년대 – ‘씨앗유 논쟁’과 소비 트렌드 변화

미국을 중심으로 ‘Seed‑oil‑free’ 식단이 퍼지며 카놀라·대두·해바라기유에 대한 부정적 담론이 커졌다. 글로벌 레스토랑은 특정 원료를 강조한 메뉴 라벨링으로 대응했고, 국내 시장도 영향을 받았다. 2025년 스타벅스가 아보카도유를 시험 도입한다고 밝힌 이후, 대체 기름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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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씨앗유 OUT’ 챌린지가 확산되며, 실제로 일부 인플루언서가 전량 올리브유·아보카도유로 교체 인증을 올렸다.
  • 식품업계는 가열용 올리브유(정제유)와 고올레산 해바라기유를 블렌딩한 ‘하이브리드 오일’ 신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틈새를 공략하고 있다.

8. 2025년 이후 – 아보카도유와 차세대 기름 트렌드

아보카도유는 발연점이 약 250 ℃로 높고, 단일불포화지방이 많아 ‘고열 조리에 적합한 건강유’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국내외 식품사들은 이미 대량 계약을 체결해 원가를 낮추고 있으며, 곡물 가격 불안에 대비해 조조열 브랜드의 ‘식물성 배터리’용 폐식용유 회수 사업도 탄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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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멕시코산 아보카도유 원료는 현지 노동·물 사용 문제로 ESG 논란에 직면해 있다. 지속가능 인증이 앞으로 프리미엄 경쟁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 국내 스타트업 몇몇은 미세조류(藻類)에서 추출한 ‘알지유(algae oil)’로 조리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카놀라유 이후의 차차세대 기름이 될지 주목된다.

맺음말 – 이름은 바뀌어도 ‘좋은 기름’의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식용유 역사 100년은 전쟁‧경제성장‧웰빙‧ESG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참기름 한 방울이 귀했던 시대부터 카놀라유 대량 소비, 그리고 씨앗유 논쟁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는 언제나 ‘건강’과 ‘가격’ 사이에서 선택해 왔다. 앞으로도 원료 투명성, 친환경 생산, 고기능성이라는 세 키워드가 식탁 위 기름의 새 이름을 결정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