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격동의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를 만든 건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인물이었다. 관중의 실용정치, 공자의 사상, 진시황의 철권 통치, 한신의 전술처럼 각 인물은 자신의 자리에서 시대를 밀어 올렸다. 이 50명의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시대가 단순히 '싸움의 시대'가 아니라 ‘말과 전략, 사상과 인내의 시대’였음을 알게 된다. 각각의 선택과 실패, 승리와 몰락이 모여 오늘날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가 되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 춘추시대 – 개혁과 패권의 씨앗 (10인)
1. 관중(管仲)
제나라 재상 관중은 곡물 10% 균일세와 군사·행정 일원화를 통해 '부국강병'이라는 국가 운영 공식을 탄생시켰다. 세금은 가볍고 집계는 쉬워져 소농 경제가 살아났고, 농민이 곧 병사라는 구조는 기동성이 뛰어난 상비군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제 환공의 패권 기반이 완성되었고, 관중의 정책은 전국 각국이 앞다투어 벤치마킹했다. 한비자는 후일 "열 대에 걸쳐 이익을 남긴 사람"이라 평가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관중을 18세기 조세·군제 개혁의 롤 모델로 제시했다.
2. 포숙아(鮑叔牙)
포숙아는 사업 동업자인 관중이 투자금을 잠시 유용해도 "가난해서 그랬을 것"이라며 믿어 준 인물이다. 그는 제 환공에게 "관중을 쓰면 제나라가 천하를 얻고, 버리면 패한다"고 설득해 친구를 재상 자리에 올렸다.
이후 관중이 출세하자 한발 물러났고, 둘의 우정은 '관포지교'란 고사로 남았다. 현대 중국 HR 교과서는 포숙아를 "인재를 알아보는 태초의 헤드헌터"라 소개하며, 신뢰 기반 조직문화의 전범으로 꼽는다.
3. 제환공(齊桓公)
즉위 직후 형제들과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을 벌였지만, 관중을 재상으로 기용해 첫 번째 춘추 패자에 올랐다. 회맹에서 주 왕실의 허약한 권위를 대신해 질서를 세우며 명실상부한 '맹주'가 되었다.
하지만 후궁 간 세자 다툼을 방치해 말년에 정국이 붕괴되었고, 시신이 두 달 동안 썩어갈 때 아무도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았다. 훗날 명·청 조정은 붕당이 심화될 때마다 "제환공의 말년을 거울삼으라"는 교서를 내렸다.
4. 진문공(晉文公)
아버지의 총신을 피해 19년간 유랑한 뒤 귀국해 왕위에 복위했다. 망명 생활에서 길러 낸 인재 감별력으로 호언, 두백, 조쇠 등 '진나라 사대부 군단'을 구축했다.
귀국 직후 열린 호로 회맹에서 약소국 요청을 먼저 처리해 신뢰를 얻었고, 제후 연합군을 이끌어 두 번째 춘추 패자가 되었다. 이후 유방·주원장 등 난세 영웅들이 스스로를 "진문공 같은 귀환자"로 비유하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5. 송양공(宋襄公)
전쟁에서도 예의를 지킨다며, 강을 건너던 적이 진영을 갖출 때까지 공격을 미뤘다가 참패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송양지인'은 현실을 모르는 선의, 즉 무능한 이상주의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전국 말 강경 통치를 주장한 법가 학자들은 "의(義)만 따지다 망한 송양공처럼 되지 말라"며 자신들의 강압 정책에 명분을 부여했다. 선의와 실용의 균형이란 화두가 이때 처음 공론화됐다.
6. 오자서(伍子胥)
초나라에서 부친과 형이 억울하게 살해되자, 오나라로 망명한 뒤 복수를 다짐했다. 초 수도 영을 함락하고, 초 평왕의 시신을 채찍으로 세 번 내리쳤다는 '편시' 일화로 복수극의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지나친 직언 탓에 오왕 부차에게 미움을 사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한무제는 간신을 숙청하며 "오자서처럼 한을 풀겠다"고 공언해, 그 이름은 '충성과 비극'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7. 손무(孫武)
궁녀 180명을 두 진영으로 나눠 직접 시범 훈련을 진행해 '규율이 없으면 군대가 아니다'를 증명했다. 『손자병법』 13편은 심리전·정보전·외교전까지 포괄한 교과서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길이 최상"이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미국 CIA는 20세기 후반 심리전 매뉴얼에 손무의 구절을 인용했고, 나폴레옹·맥아더도 침상 머리맡에 『손자』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동서고금 군사 전략의 영구적 템플릿이다.
8. 합려(闔閭)
아버지를 시해한 공손광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뒤, 손무와 오자서를 등용해 오나라를 중흥시켰다. 초나라를 격파해 패권을 얻게 됐지만, 월나라의 반격 속에 전사해 '강한 추진력과 큰 빈틈'을 동시에 드러냈다.
합려의 실패는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을 통해 극적으로 부각되었고, '방심은 패망으로 이어진다'는 교과서적 사례가 됐다. 현대 프로젝트 관리서도 "합려형 추진력은 좋지만 리스크 관리 없이는 위험"이라 평가한다.
9. 구천(勾踐)
패전 후 초가집에 누워 장작 더미를 침대 삼고, 쓴 쓸개를 핥으며 결의를 다졌다는 와신상담 일화로 유명하다. 20여 년 간 국력을 키워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승리 후 내정을 돌보지 않아 월나라는 급격히 쇠퇴했다. 한 고조 유방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전쟁 직후 세제·농업을 정비하며 "나는 구천처럼 자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0. 범려(范蠡)
오·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새를 잡고 나면 좋은 활을 태운다'며 조기 은퇴해 상인으로 변신했다. 도산에서 세 번 큰부자가 되면서 '범려형 투자법'이라는 말이 생겼다.
범려는 친구에게 '호접공자(호랑이·나비)'란 호를 남기고 떠났는데, 이는 "때를 보아 가볍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잔혹한 권력 게임에서 살아남은 지혜의 상징이다.
🟩 전국 전기 – 사상과 개혁의 실험실 (10인)
11. 공자(孔子)
춘추 말기 예(禮)와 인(仁)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한 사상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기겠다는 제후는 끝내 없었지만, 14년 유랑 끝에 귀국해 교육에 집중했다. 제자 3천 명·72현인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남겨, 살아서는 정치를 잃고 죽어서는 문화를 얻었다.
『논어』 곳곳엔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즐겁다”처럼 오늘날 평생학습 담론과 이어지는 구절이 가득하다. 청나라 말 신학제(新學制)를 추진한 양무파 관료들은 근대학교 교칙 서두에 공자의 어구를 넣어 개혁 저항을 누그러뜨렸다.
12. 자산(子產)
소국 정나라의 재상. 백성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읍마다 ‘여론함’을 걸어 두었는데, 험담 대신 실명 건의가 빗발쳤다. 자산은 민원 80%를 실제 법령에 반영해, 정나라는 주변 강대국에 비해 국력은 약하지만 내정이 단단한 ‘모범 소국’으로 불렸다.
그의 시정 방식을 훗날 노무현·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도입한 ‘국민청원 게시판’에 빗대어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작은 목소리를 제도화하면 거버넌스가 생존한다는 증거다.
13. 노자(老子)
주(周) 왕실 도서관장으로 일하던 그가 서쪽 관문을 떠날 때, 관리 윤희의 부탁으로 5천 자를 남긴 책이 『도덕경』이다. 노자는 “가장 훌륭한 통치는 존재감이 없다”고 주장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파했다.
진시황이 분서(焚書)를 명령하면서도 『도덕경』만은 따로 보관하게 했다 전해진다. 20세기 소로·간디가 ‘작은 정부, 비폭력’ 논리를 펼 때 인용해 노자의 무위철학은 국경을 넘어 현대 환경·탈성장 담론까지 영감을 줬다.
14. 묵자(墨子)
“모두를 두루 사랑하고(兼愛) 침략 전쟁을 반대하라(非攻)”를 외친 전국 초기 최대 평화론자. 그는 공성(攻城)‧수성(守城) 기계 제작에도 능해, 성벽 위에 회전 쇠추를 달아 적 사다리를 쳐냈다.
묵자의 기술·윤리 결합 모델은 중국 과학사학계의 ‘기술인문 융합’ 논문에 단골로 언급된다. 또한 겸애 사상은 1990년대 국제 NGO가 중국에 진입할 때 토착적 평화사상의 근거로 활용됐다.
15. 맹자(孟子)
성선설을 주장하며 “백성은 물, 군주는 배 – 물이 배를 띄우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경구를 남겼다. 제 선왕에게 ‘왕도(王道) 정치’를 설득하고도 실패했지만, 맹자 덕분에 유가는 민본주의 색채를 얻게 됐다.
1989년 톈안먼 시위 후 중국 지식인들은 맹자의 ‘민심이 곧 천심’ 구절을 기사와 강연에서 반복 인용해, 정치 개혁 명분을 전통에서 찾으려 했다.
16. 순자(荀子)
인간 본성은 악하니 예(규율)와 교육으로 길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자 이사와 한비자는 스승의 ‘성악’·‘예법’을 바탕으로 법가를 완성해 진 제국 통일의 이론 백본이 됐다.
순자 본인은 유가 학맥을 고수했지만, 공·사 영역 구분과 시험제(科擧) 확대안을 설계해 ‘관료국가의 설계도’라 불린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도 순자의 익히기(習) 노선을 받아들여 서원 교과를 구성했다.
17. 오기(吳起)
위나라 변법을 추진하다 초나라로 옮겨 양국 군제·토지 제도를 혁신했다. 진흙탕 참호에서 병사 발에 난 종기를 빨아 준 일화는 ‘솔선수범’ 리더십 교재에 빠지지 않는다.
그가 도입한 군공수작제(공을 세우면 바로 작위를 줌)는 상앙변법·진 통일군제의 직계 조상으로, 현대 기업 인사제도의 ‘성과 연봉제’ 도입 논문에서도 언급된다.
18. 한비자(韓非子)
말을 더듬어 직접 설득이 어려웠기에 글로 정교하게 논리를 쌓았다. 『세난(說難)』에서 “말은 상대 귀에 꽂힐 때 비로소 힘이 된다”고 썼고, 이는 오늘날 광고 카피라이팅 강의의 1교시 인용문이다.
진시황이 글에 매료돼 불렀지만, 동문 이사에게 모함받아 옥중 독배를 마셨다. ‘콘텐츠는 완벽해도 조직 정치가 막히면 죽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알려 줬다.
19. 상앙(商鞅)
거리 한쪽에 기둥을 세우고 “옮기면 금을 주겠다” 약속한 뒤 실제로 상금을 지급, 법령 홍보에 성공했다. 이후 토지 사유화·10가 호적제를 실시해 귀족 특권을 차단했다.
그러나 국왕이 바뀌자 새 법대로 거열형을 당했다. 법치의 ‘셀프 부메랑’ 사례로, 현대 중국 사법개혁 논쟁에서 상앙의 최후가 자주 소환된다.
20. 위혜왕(魏惠王)
처음으로 자신을 ‘왕’이라 부르며 제후 간 서열 파괴를 선언했다. ‘왕호(王號) 시대’의 문을 연 셈. 그 여파로 전국 7국 모두 왕을 칭해, 주 왕실 권위가 사실상 사라졌다.
위혜왕은 또한 여불위의 상업·외교 전략을 선구적으로 시도해, 위나라를 금융·외교 중심지로 만들었다. “브랜드를 바꾸면 시장이 뒤집힌다”는 경영학 사례가 여기서 비롯됐다.
다음 편(21~40) 예고
외교의 입으로 천하를 뒤흔든 공손연·장의·소진, 오랑캐 복장을 자청한 혁신 군주 무령왕, 늙어도 기세는 꺾이지 않은 염파, 무릎을 잘린 뒤에도 병법을 빚어낸 손빈과 그를 시기하다 몰락한 방연, 수백 문객을 거느린 4군(四君)―맹상군·평원군·신릉군·춘신군―까지. 그리고 장평의 피바람을 일으킨 백기, 국경을 혼자 막아낸 이목, 55년 설계 끝에 통일을 가속한 진 소양왕, “군량 3년”을 외친 신중의 화신 왕전, 문자·도량형을 통일한 이사, 상인에서 재상으로 오른 여불위, 마침내 최초의 황제 자리에 선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다음 편은 혼란의 종지부를 찍으며 **‘대통합으로 향하는 전국 말기’**를 세밀하게 해부합니다. 준비되셨다면, 곧 이어질 21~40인의 파란만장한 무대에서 다시 만나요.